현장에서 찾아보기
- 新천변풍경
- 근대도시 경성의 문화 기행
- 전쟁이 휩쓸고 간 서울의 길
- 억압된 욕망으로 갈등하는 한 여성의 일탈 여행
- 낙도 어린이들의 서울 나들이
- 성공을 찾아 떠났던 성칠의 서울살이
- 구보씨와 함께 하는 도보 탐사
- 城下東村 建築遊覽
여기에서는 서울연구원이 2018년 발간한 『서울감성여행』에 담긴 여덟 가지 미래유산 답사코스를 소개하였다. 대중교통과 도로로도 쉽게 찾아갈 수 있는 한양도성 내부지역의 미래유산을 여덟 가지의 이야기 주제를 바탕으로 하나의 답사코스로 연결하였다. 각각의 미래유산 답사코스는 크게 기본코스와 연장코스로 구분하여 제시하였다. 기본코스는 여덟 가지 답사코스의 주제를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는 핵심코스로 걸어서 2시간 이내에 둘러볼 수 있도록 기획하였다. 하지만 여행자의 취향에 따라 반나절 또는 하루 코스도 가능도록 연장코스도 별도로 제시하였다. 연장코스의 경우에는 도보 이외의 지하철, 시티투어버스 등 다양한 보조교통수단을 함께 이용할 수 있도록 제안하였다. 그러나 여행자의 의도에 따라서 자유롭게 답사코스를 구성해도 좋겠다. 경우에 따라서는 낮보다 밤에 걷는 것이 더욱 운치 있는 답사코스도 있을 것이요, 외국인 친구와 함께 걸으면서 서울을 소개하여도 좋은 코스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답사코스에 소개된 미래유산이 궁금하다면 답사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서울감성여행』을 한번 읽어 보는 것을 추천한다.
서울사람이 공유하는 근현대의 기억과 감성을 여덟 가지 주제를 담은 미래유산 답사코스에서 발견해 보기를 희망한다.
첫 번째 이야기_1920年代
서울 사람들이 함께 공유하고 공유할 만한 공통의 기억과 감성을 시민참여를 통하여 발굴하는 서울시의 미래유산 보전정책과 유사한 시도가 일제강점기 경성에서도 있었다. 1924년 동아일보가 미디어 이벤트로 진행한 내동리 명물이 그것이다. 내동리 명물은 당시 경성시내의 동(洞)과 정(町)에서 하나의 명물을 발굴하는 시민공모사업으로 조선인이 주로 생활하였던 85개동과 15개정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명물의 선정조건은 각각의 동과 정에서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이야깃거리로, 내동리 명물에 투고한 사람들의 명물선정배경에서 1920년대 도시풍경을 바라보는 경성시민의 시각을 엿볼 수 있다. 명물로 선정된 것들에는 우물ㆍ다리ㆍ굴과 같은 토목시설과 건축물, 일본인이 거주하는 빈민굴, 취급품목이 달라진 시장, 앵두ㆍ배추ㆍ사과 등 생산이 줄어든 과수원, 소외계층에 해당하는 기생ㆍ갈보ㆍ거지, 오랜 시간 지역을 지킨 노거수, 하찮은 모기와 파리까지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는 내동리 명물을 통하여 소개된 1920년대 경성의 풍경과 서울의 미래유산에 투영된 공통의 감성과 기억을 비교함으로써 도시의 풍경과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하여 왔는지를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특히 청계천 인근의 동을 중심으로 하나의 명물과 하나의 미래유산을 각각 대비시킴으로써 사람들이 쉽게 1920년대와 오늘날의 변화모습을 찾아볼 수 있도록 하였다.
두 번째 이야기_1930年代
1931년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일제가 대륙침략을 본격화하면서 경성의 모습도 크게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영등포 일대에 공업단지가 형성되면서 많은 일자리가 생겨나자 인구가 증가하였으며 이에 따라 소비시장도 발달하였다. 특히 미쓰코시백화점(三越百貨店)은 경성의 대표적인 소비공간이자 선진문화를 소개하는 문화 아이콘이었다. 하지만 경성에는 자본주의적 소비문화를 향유하는 상류층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인간 이하의 생활을 강요받는 수십만 경성부민(府民)도 있었다.
한편 전시체제(戰時體制)가 강화되면서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구호 아래 조선어 교육이 폐지되고 창씨개명(創氏改名)으로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뀌었다. 외형적으로는 조선인과 일본인을 구분하기가 어려워졌지만 조선인들은 어디까지나 하층 일본인, 노예상태의 일본인이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는 야만적이고 무절제한 폭력이 수반되었다. 조선인이 기꺼이 일본인과 같아지려 하지 않는 한, 폭력은 일상적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서는 서울 미래유산 가운데 1930년대를 전후(前後)로 하여 일제강점기 경성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장소는 물론 당시 사람들의 삶을 유추할 수 있는 문학작품, 대중가요, 동시대에 개업한 음식점이나 가게를 찾아볼 수 있는 문화기행 프로그램을 제안하였다. 경성의 대표적인 교통수단 가운데 하나였던 인력거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사랑받았던 외식음식이었던 설렁탕, 일제의 폭거에 저항하였던 경성사람들의 애처로운 몸부림 등을 체험할 수 있는 장소에서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기억과 감성을 느껴볼 수 있도록 기획하였다.
세 번째 이야기_1950年代 6.25전쟁
미래유산으로 선정된 『나목』은 박완서의 등단작으로서 197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현상모집 당선작이다. 1951년 11월부터 1953년 초까지의 한국전쟁 시기의 서울 한복판을 시공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는 이 작품에는 작가의 실제 삶이 진하게 녹아들어 있다.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집안의 유일한 남자이자 기둥이었던 오빠를 잃고 어린 나이에 미군 PX의 초상화부에 근무하며 생계를 책임지던 시기, 박완서는 이 작품에서 또 하나의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옥희도의 모델인 박수근을 만났다. 박수근도 6.25전쟁 당시 이곳에서 생계를 위해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다.
이 작품의 주제는 이경이 옥희도의 집에서 우연히 발견한 벌거벗은 나무그림에 응축되어 있다. 6.25전쟁 당시 이경은 그것이 말라서 죽어버린 나무, 고목(枯木)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어느새 중년이 되어 버린 그녀에게 그때 그 나무는 앞으로 다가올 봄을 기다리기 위하여 추위를 견디는 나목(裸木)이었다. 이는 전쟁의 고통 속에서도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이경의 강인한 생명력을 말하고자 하였던 박완서의 메시지가 담긴 것이었다.
여기에서는 초상화부 점원이었던 이경과 이곳의 환쟁이였던 옥희도, 그리고 전기공 태수가 처음 만나고 함께 일하였던 신세계 백화점, 쇼윈도 너머 푹신한 외투를 입고 있는 날씬한 마네킹을 동경하고 태엽만 틀어주면 징도 치고 위스키도 마시는 장난감 침팬지를 바라보며 마음껏 소리 내어 키득대었던 명동거리, 21살이 되던 설날에 태수와 함께 영화를 보던 스카라극장 등, 소설 속 이경이 바라보았던 서울의 풍경을 지금의 서울거리에서 해우함으로써 잠시 머릿속에 묵혀두었던 『나목』의 기억과 감동을 다시금 체험할 수 있도록 하였다.
네 번째 이야기_1960年代
미래유산으로 선정된 영화 <귀로>는 대사나 플롯에 의지하기보다는 영상을 통해 함축된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였던 이만희 감독의 대표작이다. 한 여성의 억압된 욕망과 갈등을 다루면서 그 원인의 제공자로 성불구인 남편을 등장시키는 <귀로>의 전개과정은 매우 진부하고 상투적이지만 영화의 인물들이 처한 상황이나 심리를 하나의 쇼트(shot)를 통하여 어떤 대사보다 정확하고 예리하게 표현함으로써 영화의 모던함을 살렸다.
그리고 배우 문정숙의 지적이고 절제된 관능은 영화가 ‘방황하는 여심’이라는 주제적 상투성을 극복하게 하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그녀가 육교 위에 서있는 장면이나 서울역 개찰구에서의 망설임, 남편의 방에서 나와 개를 쓰다듬는 손길에서 묻어나는 외로움 등, 문정숙의 연기는 곳곳에서 빛나는 장면들을 만들어냈다.
여기에서는 6.25전쟁으로 하반신 마비가 된 남편(김진규)을 대신하여 가끔씩 서울의 신문사에 원고를 전달하러 오는 지연(문정숙)의 서울 나들이에 집중하였다. 집을 떠나 낯선 도시의 여기저기를 방황하는 이 시간은 지연이 잠시나마 억압된 욕망과 갈등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서울의 여기저기를 방황하는 지연의 뒷모습을 따라가며 영화 속 앵글에 투영된 서울의 모습에 집중하였다. 지연과 강기자(김정철)가 남편의 원고에 대하여 짧은 대화를 나누던 육교에서 내려다보이는 서울시청과 대한문, 도로를 관통하는 기차로 인하여 가던 길을 잠시 멈춰서야 했던 서소문 건널목, 지연과 강기자가 짧은 밀회를 즐기고 어색하게 헤어지던 서울역 앞 지하보도 등을 산책하면서 그 당시 서울이라는 도시가 여성에게 선물하던 감정적인 해방감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다섯 번째 이야기_1960年代
영화 <수학여행>은 유현목 감독의 1969년 작품으로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섬 밖으로는 나간 본 적이 없는 어린이들이 서울로 수학여행을 와서 겪는 에피스드를 그렸다. 갯지렁이를 팔아서 마련한 돈으로 서울에 처음 온 순박한 아이들이 백열등, 수돗물, 빌딩, 텔레비젼, 전화기, 전차 등을 신기함과 놀라움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모습은 문명의 이기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신선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또한 아이들의 수학여행 과정에서 간간히 보이는 서울역, 창경원, 남산의 모습과 길 한복판에 마련된 보행위반자 계도소 등에서 1960년 후반 서울의 풍경과 시민의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다.
한국 리얼리즘의 대표적인 작가로 알려진 유현목 감독의 영화 <수학여행>은 그가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영화와는 다소 동떨어진 계몽영화 계열의 작품이다. 하지만 한국의 근대적 발전상을 찬양하였던 당시의 그렇고 그런 계몽영화와는 달리 유현목 감독은 낙도 어린이의 눈을 통해 이상적인 한국사회의 발전상을 그려보고자 하였다. 그는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낙도 어린이들이 보여주었던 놀라움과 경탄을 통하여 기술문명의 발전을 정당화하고 발전의 전국적인 확대라는 새로운 목표를 부여하였다. 하지만 서울 아이들의 물질적인 도움에 감사하지만 이에 의존하지 않는 시골 아이들의 모습에서 발전의 전국적인 확대에 대한 지향점을 제시하였다.
여기에서는 영화 속 낙도 어린이들의 체취가 아직도 남아 있는 1960년대 서울의 대표적인 수학여행 코스였던 서울역, 숭례문, 창경원, 남산 등을 둘러보는 답사코스를 제안하였다. 학창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설렘으로 밤잠을 설쳐 던 수학여행의 추억을 떠올려 보며 서울의 여기저기를 산책할 수 있는 코스를 제안하였다.
여섯 번째 이야기_1960年代
미래유산으로 선정된 『길』은 손창섭이 1973년 일본인 아내와 일본으로 이주하기 전 마지막으로 쓴 세태소설로 1968년~1969년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다. 1960년대 후반 한국 사회가 처한 부조리한 현실상황을 충청남도 서산 어느 시골 마을에서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올라온 최성칠이라는 열여섯 살 소년의 눈으로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당시 서울에는 먹여주고 재워주고 기술만 가르쳐준다면 어떻게든 성공하여 가난의 굴레 속에서 허덕이는 고향의 가족을 보살피겠노라 꿈꾸던 성칠과 같은 젊은이들로 넘쳐났다. 그러나 그들이 고된 서울살이에서 맞닥뜨려야 하였던 것은 그들을 단지 ‘소비’하면서 자기 욕망을 채워 나가는 기성사회의 타락상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타락상이 일상생활의 습속(習俗)이 되지 않는다면 그들의 성공은 보장될 수 없었다. 함께 타락하여야 살아남을 수 있는 이러한 모순은 인간자체의 결함이 아니라 6.25전쟁에서 비롯된 인간성의 불구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여기에서는 성공의 꿈을 안고 상경한 성칠이 부정부패가 만연한 서울에서 이용만 당한 채, 결국에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마는 소설의 흐름을 따라 산책하면서 1960년대 서울의 풍속도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을 비교할 수 있도록 기획하였다. 서울로 들어서는 기차의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서울의 지저분한 인상과 사람들과 자동차로 분주한 서울역 앞 광장의 모습, 난생처음 타보는 케이블카와 남산 꼭대기 팔각정 앞에서 내려다보이는 고충 건물로 가득한 서울의 모습, 남주 아가씨와의 기이한 동거로 인하여 남철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던 인적이 드문 남산 도서관. 타락한 서울에서 도덕적 순수함을 지키기 위하여 몸부림치던 성칠의 모습이 남아있는 서울의 여기저기를 찾아보면서 그 속에 담긴 공통의 기억과 감성을 발견해 볼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일곱 번째 이야기
미래유산으로 선정된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한국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수작이다. 모더니즘은 현대도시문명을 바탕으로 전통적인 예술과는 구별되는 실험정신과 실험기법을 보여주는 문학적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드러난 모더니즘적 특성은 크게 현대인의 생활을 조사·연구함으로써 현대의 세태풍속을 고찰한다는 고현학(考現學)적 측면과 작가가 자기 자신과 작품의 창작과정 자체를 그대로 드러내는 자기반영적 글쓰기라는 측면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소설의 주인공인 구보는 낮 12시경에서 새벽 2시정도까지 전차를 타거나 걸으면서 1930년대 서울의 풍속을 세세히 묘사하였다. 모두 31장으로 구성된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룸펜 인텔리인 소설가 구보는 청계천변 다옥정(다동)에서 출발하여 동대문, 장곡천정(소공동), 경성역(서울역), 종로를 거쳐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데 이 여로에서 모던 서울의 풍속이 빼곡히 드러나 있다. 그러나 구보가 바라본 서울의 모습은 일본인의 거주지를 비껴난 조선인들의 공간이다.
여기에서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구보씨가 이동한 루트를 따라서 주변의 미래유산을 답사하며 숨겨진 미래유산의 가치를 체득할 수 있는 도보답사 프로그램을 제안하였다. 향후 서울 토박이 도보 해설사의 서울 사투리를 들으면서 서울만의 독특함을 체험하고 체험 후기를 통하여 참가자들이 서로 몰랐던 이야기를 교환하면서 새로운 서울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기회로 활용하도록 하였다.
여덟 번째 이야기
한양도성의 동부지역은 조선시대 동촌(東村)이라고 불리었는데 조선왕조실록에 "동촌의 구석진 곳으로 이사하여 세상을 멀리할 뜻을 보였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 지역은 서울이되 서울이 아닌 한산한 지역이었다. 이는 창덕궁이 내려다보이는 낙산일대에 일반인의 거주가 불허되었기 때문이었다. 한일병탄으로 왕조시대가 막을 내리자 넓은 공터가 남아 있던 이 지역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1925년 동숭동과 연건동에 들어선 경성제국대학과 동대문 부근에 건립된 경성운동장은 동촌의 경관을 바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경성제국대학의 개교를 계기로 이 지역에는 학교관련 상업·업무시설과 주택 등이 더해져 ‘학교촌’이라는 이미지가 형성되었고 경성운동장은 당시 지어진 경성역, 조선신궁과 함께 일제의 식민통치를 상징하는 경성의 대표적 랜드마크가 되었다. 그리고 해방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서울의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여전히 서울의 변두리 지역이었던 동촌에 서민을 위한 새로운 주거지가 형성되면서 지금의 동촌경관을 이루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한양도성을 따라 동촌에 남아있는 도시건축유산을 산책하면서 한양, 경성 그리고 서울에 이르는 향토 서울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조선시대 동촌의 관문이었던 흥인지문과 혜화문, 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학의 옛 캠퍼스건물, 대한민국 초대내각을 구성했던 이화장과 실행민의 애환이 담긴 평화시장, 대한민국 현대건축의 토대를 마련하였던 김수근과 김중업의 건축유산, 그리고 해체주의 건축가 자하하디드의 동대문디자인프라자. 조선시대의 전통건축에서 오늘날의 현대건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건축유산에 남아있는 공통의 기억과 감성을 발견하고 서울의 도시계획사, 건축사, 향토문화사를 한꺼번에 체험할 수 있도록 기획하였다.